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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제5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26년 1월 1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를 향하여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이 오랜 인사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주님 부활 대축일 저녁에 하신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라는 그분의 말씀은 그저 평화를 향한 바람이 아니라, 이 인사를 받는 이들에게 참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고 결과적으로 모든 현실에도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러하기에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온 세상에 날마다 가장 조용한 변혁을 외칩니다. 로마 주교로 선출된 저녁부터 바로 저는 이 보편된 선포와 더불어 저의 인사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 곧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겸손하고 인내하는 평화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평화는 아무 조건 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1)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며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품어 안으시는 착한 목자이신(요한 10,11.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인류를 갈라놓는 분열의 장벽들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참조). 그리스도의 현존, 그분의 선물과 그분의 승리는 인내로운 수많은 증인을 통하여 계속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우리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더욱 선명히 빛나게 됩니다.

 

어둠과 빛의 대비는 새 세상이 태어날 때의 산고를 묘사하는 성경의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파고 들어와 우리가 맞닥뜨리는 시련과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어둠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빛을 보고 그 빛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고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초대하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가닿고자 하는 부름입니다. 평화는 실재하며 우리 안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평화는 우리를 깨우치고 우리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부드러운 힘을 가졌습니다. 평화는 폭력에 저항하고 폭력을 이깁니다. 평화는 영원의 숨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악에게는 “그만”이라고 외치지만 평화에게는 “영원히” 하고 속삭입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러한 지평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제3차 세계 대전’이라고 부르신 것들 한가운데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이러한 확신에 힘입어 계속해서 어둠의 확산에 저항하고 밤의 파수꾼처럼 서 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빛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어둠과 공포로 일그러진 세상을 바라보는 편향되고 왜곡된 관점에 휩쓸리고 맙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희망이 없고 다른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잊어버리는 이러한 담론들을 ‘현실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죄로 상처를 입었더라도 언제나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작용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 깊이 평화를 소중하게 여김으로써 평화의 빛나는 온기를 주변에 전파할 수 있도록 평화와 떼어낼 수 없는 우정을 맺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성인은 그의 공동체에 전하는 설교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평화로 인도하고 싶다면 여러분부터 평화를 지니십시오. 평화 안에서 굳건해지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불꽃을 전하고 싶다면 여러분 안에 타오르는 불꽃을 지녀야만 합니다.”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선물을 지녔든 지니지 않았다고 느끼든, 우리 마음을 평화에 열려 있게 합시다!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또 우리의 손 닿는 곳 너머에 있다고 여기기보다는 그 평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알아봅시다. 평화는 하나의 목표이기 이전에 실재이고 여정입니다. 평화가 폭풍우의 위협을 받는 작은 불꽃처럼 우리 안에서나 우리 주변에서 위험에 놓일 때에도 우리는 평화를 보호해야 하며 평화를 증언해 온 이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는 우리의 선택을 이끌고 밝히는 원칙입니다. 폐허만 남은 곳 그리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잊지 않은 이들을 발견합니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이 두려움과 낙담 속에 모여 있는 곳에 오신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는 계속해서 그분 증인들의 목소리와 얼굴을 통해서 문과 장벽을 뚫고 들어갑니다. 이러한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선을 기억하고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선을 다시 선택할 수 있고, 이 모든 것을 함께 이룰 수 있습니다.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

 

예수님께서는 잡혀가시기 바로 전에 친밀한 신뢰를 나누시며 당신과 함께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곧이어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그들의 고통과 공포는 분명 예수님께 곧 닥칠 폭력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깊이 살펴보면, 복음서들은 제자들을 힘들게 하였던 것이 예수님의 비폭력적인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비폭력적인 응답은 그들 모두가, 그 가운데에서도 베드로가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하였던 길입니다. 그러나 스승께서는 그들에게 끝까지 이 길을 따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계속해서 불편함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분께서는 무력으로 당신을 보호하려는 이들에게 단호히 되풀이하십니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요한 18,11; 참조: 마태 26,52).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는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입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 한가운데에서도 그분의 평화는 비폭력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또한 비극적인 상황에 너무나 자주 연루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함께 이 새로움의 예언자적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위대한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인식을 지니고 자비로이 행동하도록 초대합니다(마태 25,31-46 참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폭력의 속임수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된 형제자매들을 자기 곁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평화를 향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지라도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세상 앞에서 종종 큰 무력감에 짓눌리곤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미 이 특별한 역설을 언급하였습니다. “평화를 소유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마도 평화를 찬미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평화를 찬미하기 위해서 우리는 필요한 재능이 부족함을 깨닫고 올바른 생각과 단어를 신중히 고르며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얻기를 바란다면 평화는 우리 손 닿는 곳에 있어 노력하지 않고도 이를 소유할 수 있다.”3)

 

평화를 먼 이상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평화가 부정되거나 심지어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나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올바른 생각들, 사려 깊은 말들, 그리고 평화가 가까이 왔다고 말할 역량이 우리에게는 부족한 듯합니다. 평화가 사람들이 살아가고 가꾸며 지켜 나가는 현실이 되지 않을 때, 가정생활과 공공 생활 안에 공격성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시민과 통치자의 관계에서는 전쟁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고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며 폭력에 폭력으로 되갚지 않는 것조차 결점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정당방위의 원칙을 훨씬 넘어서는 이러한 대립의 논리가 이제 세계 정치를 지배하며 날이 갈수록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정부 지도자가 군비 증액을 거듭 촉구하고 그에 따른 선택을 내리는 것을 외부 위협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제시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군사력의 억제력, 특히 핵 억제력이라는 발상은 법과 정의와 신뢰가 아니라 공포와 무력 지배 위에 세워진 국가 간 관계의 비합리성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 이미 그 시대에 말씀하신 대로, “결국 사람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 폭풍전야처럼 끔찍한 폭력이 덮쳐 올까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두려움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 그러한 무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초래할 끔찍한 살육과 파괴를 감히 책임지겠다는 자가 있으리라 믿기 어렵지만, 우발적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재난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4)

 

또한 2024년, 전 세계 군비 지출이 전년 대비 9.4% 증가하여 지난 10년간의 증가 추세를 이어가며 총 2조 7,180억 달러(전 세계 GDP의 2.5%)에 이르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5) 더욱이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대응은 재무장을 위한 막대한 경제적 투자뿐만 아니라 교육 정책의 전환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20세기에 힘들게 얻은 교훈을 지키고 수많은 희생자를 잊지 않는 기억의 문화를 증진하기보다 학교와 대학교, 언론 매체에서 위기의식을 퍼뜨리고 무장 방어와 안보의 개념만 부추기는 조직적인 선동과 교육 프로그램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화의 원수들도 사랑합니다.”6)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며, 관계를 단절하거나 줄기차게 비난만 하지 말고 경청하며 다른 이들과 최대한 대화를 나누라고 권고하였습니다. 60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와 현대 세계의 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인식을 새롭게 다지며 마무리되었습니다. 특히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은 전쟁의 진화에 주목하였습니다. “현대 전쟁의 독특한 위험은, 현대식 과학 무기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범죄를 자행할 기회를 제공하고, 일종의 냉혹한 연쇄 반응으로 인간 의지가 극도의 참혹한 결정을 내리도록 충동을 받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앞으로 이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한자리에 모인 전 세계의 주교들이 모든 사람에게, 특히 국가 통치자들과 군사 지도자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또 온 인류 앞에서 그토록 막중한 책임을 심사숙고하기를 간청한다.”7)

 

공의회 교부들의 호소를 되새기고 대화가 모든 차원에서 가장 효과적인 접근 방식임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급격한 기술 발전과 인공 지능의 군사적 활용이 무력 분쟁의 비극을 더욱 악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정치 군사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이 점점 더 기계에 ‘위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보호하는 인본주의의 법적 철학적 원칙들을 유례없이 파괴적으로 저버리는 것입니다. 사적 경제 금융 이익의 극심한 편중이 국가들을 이러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실정을 규탄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과 비판적 사고를 일깨워야 합니다.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러한 깨달음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망루와 방벽이 가득한 그 세상에서 도시들은 유력 가문들이 벌이는 피로 얼룩진 전쟁을 겪었고, 소외된 변방의 비참한 지역은 더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프란치스코는 내면의 참평화를 얻었고 다른 이를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웠으며, 스스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 모든 이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방법을 찾았습니다.”8) 이는 오늘날 우리가 계속 본받도록 부름받는 이야기로서,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곧 열린 마음과 복음적 겸손에서 비롯되는 평화를 위하여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선은 무기를 내려놓게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하느님께서 어린아이가 되신 이유일 것입니다. 가장 깊이 내려가 죽은 이들의 거처에까지 다다르는 그 강생의 신비는 젊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시작되어 베들레헴의 구유 안에서 드러납니다. 천사들은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하며, 무방비 상태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알립니다. 인간은 그분을 돌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루카 2,13-14 참조). 어린아이만큼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존재는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자녀들과 그처럼 연약한 다른 이들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꿰찌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사도 2,37 참조). 이와 관련하여, 존경하는 선임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무엇이 오래 가고 무엇이 덧없이 지나가는지, 무엇이 생명을 가져다주고 무엇이 죽음을 가져오는지 우리가 더 명료하게 깨우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까닭에 우리에게는 흔히 자신의 한계를 부정하려 할 뿐만 아니라 약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 개개인과 공동체가 선택한 방향에 의문을 제기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9)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할 때에만 이룰 수 있는 ‘완전한 무장 해제’를 최초로 소리 높여 외친 교황은 성 요한 23세입니다. 그분께서는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전쟁 목적을 위한 군비 경쟁의 중지와 그 실제적 축소를 실현해야 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장 해제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에서 무기를 제거하고 전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무장 해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 무기의 균형으로 평화가 이룩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신뢰로써 참된 평화가 확립된다는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객관적으로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 올바른 이성의 외침이며,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고, 더욱 높은 유익을 인간에게 가져올 것입니다.”10)

 

고통받는 인류를 위하여 종교가 해야 하는 본질적인 역할은 생각과 말까지도 무기로 삼고자 하는 유혹이 날로 자라나지 않게 막아내는 일입니다. 올바른 이성만이 아니라 위대한 영적 전통들도 우리에게 혈연이나 민족을 넘어설 것을,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거부하는 집단을 넘어설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결코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음을 목격합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의 표현이 정치 투쟁의 장으로 끌어내려지고 국수주의를 축복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과 무장 투쟁을 정당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무엇보다 삶의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욕하는 이러한 형태의 신성 모독을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따라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물론 평화의 길이요 전통과 문화 안에서 만남의 언어인 기도와 영성,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증진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평화의 집’이 되어, 대화로써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정의를 실천하며 용서를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11) 바람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는 배려하며 생명을 살리는 사목적 창의성을 통하여, 평화가 그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이것이 정치적 차원의 중요성을 결코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높은 공적 책임을 맡은 이들은 “전 세계 국가들이 더욱 인도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숙고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정은 상호 신뢰, 조약의 성실성, 체결된 조약 의무 이행에 대한 충실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의 초점을 정밀하게 검토해야 하는데, 여기서 계약 이행의 성실성, 계약의 지속성, 계약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2) 이것이 외교와 중재, 국제법이 맡은 무장 해제의 길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초국가적 기관의 정당성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 시기에, 어렵게 맺은 조약들을 위반하는 일이 늘어나 무장 해제를 위한 이 길이 너무도 자주 훼손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국제적 힘의 균형이 깨지는 가운데, 정의와 인간 존엄성의 위기는 경종을 울리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불안과 분쟁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악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희망을 살아 있게 하는 모든 영적, 문화적, 정치적 발의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세계화의] 원동력이 인간 의지와는 동떨어진 알 수 없는 비인간적 익명의 힘이나 구조의 산물인 양” “숙명론적으로 보는 시각”13)의 확산에 맞서야 합니다. 앞서 제시하였듯, “사람들을 지배하고 무한히 승승장구하는 최고의 방법은 어떤 가치들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절망의 씨를 뿌리고 끊임없는 불신을 조장하는 것입니다.”14) 우리는 이러한 전략에 대항하여 시민 사회 안에서 자기 인식, 책임 있는 연대의 형태들, 비폭력적인 참여의 경험, 크고 작은 수준에서 회복적 정의의 실천을 북돋워야 합니다.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에서 강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체험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려는 절실한 바람을 느낍니다.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 자신들의 노고에 대하여 좋은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켜 준다. 그러나 외톨이가 넘어지면 그에게는 불행!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다(코헬 4,9-10).’ 또한 ‘의좋은 형제는 요새와 같다’(잠언 18,19).”15)

 

이것이 바로 희망의 희년이 맺는 열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의 희년은 수많은 사람이 순례자로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마음과 정신과 삶의 무장 해제를 내면에서부터 시작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을 이루어 주심으로써 분명 이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4-5) 

   

 

바티칸에서 

2025년 12월 8일

 

레오 14세 교황

 

 

1) 레오 14세, 로마와 전 세계에 보내는 첫 강복, 2025.5.8.,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72호(20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7면 참조.

 

2)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Sermones), 357, 3.

 

3) 『설교집』, 1.

 

4) 요한 23세,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4.11., 111항 수정 번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와 사회』, 1994(제1판), 241면.

 

5) SIPRI Yearbook: Armaments, Disarmament and International Security, 2025 참조. 

 

6) 「설교집」, 357, 1.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965.12.7., 80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글판, 2008(제3판), 201면.

 

8) 프란치스코,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2020.10.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1(제1판), 4항.

 

9) 프란치스코,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편집인들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to the Directors of “Corriere della Sera”), 2025.3.14.

 

10) 「지상의 평화」, 113항 수정 번역.

 

11) 레오 14세, 이탈리아 주교회의 주교들에게 한 연설, 2025.6.17.

 

12) 「지상의 평화」, 118항 수정 번역.

 

13) 베네딕토 16세,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2009.6.2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9(제1판), 42항.

 

14) 「모든 형제들」, 15항.

 

15) 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5.15., 35항 수정 번역, 『교회와 사회』, 7면.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Leo XIV for the LIX World Day of Peace, “Peace be with You All: Towards an ‘Unarmed and Disarming’ Peace”, 2025.12.8., 이탈리아어도 참조> 

 

영어:

https://www.vatican.va/content/leo-xiv/en/messages/peace/documents/20251208-messaggio-pace.html

 

이탈리아어:

https://www.vatican.va/content/leo-xiv/it/messages/peace/documents/20251208-messaggio-pace.html

 

[ 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50606?gb=K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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